그러다가 실패하기 싫어요 — 김제에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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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실패하기 싫어요 — 김제에서의 기록

콘텐츠와 비즈니스와 시도와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쉴틈없이 나누고 있는 요 며칠.

  1. 금요일 오전 9:00 티미팅

해외에서 콘텐츠 비즈니스를 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해외에서 케이팝의 인기가 많이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서브컬처, 하위문화에 불과하고 주류는 여전히 한국에 관심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 팀은 한국의 뭔가를 끌어오기보다는 콘텐츠 퀄리티 그 자체로 승부하는 길을 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산업의 역동성과 정보 비대칭이 심한 곳에서 유료 콘텐츠의 가치가 더 크다는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사실 한국은 양질의 정보가 많이 공개되어 있는 편이고, 기업들의 상황 변동도 생각보다 크지 않은, '안정된' 환경이라 사람들이 굳이 더 심도 있는 콘텐츠와 정보에 돈을 낼 이유가 없다고.

결론은 역으로 미국에서부터 시작해야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런 접근을 이야기하다니 참 대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부터 네트워크, 문화적 맥락까지 제로베이스로 시작해야 하는데... 전혀 모르던 사회에 침투해서 내부의 이야기를 발굴해 콘텐츠화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하고 있는 팀이다.

나도 그들처럼 세이프존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에 나를 던져야 다음 단계가 시작될 텐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져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를 놓쳤다.

  1. 금요일 오전 11:30~ 김제로 이동하는 차 안

티미팅이 끝나고 바로 김제로 이동했다. 김제 동행은 매거진 시리즈를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대표)님, 그리고 디자인 에이전시 대표님.

독립출판 업계에서는 유명한 분들이고, 나도 오랫동안 두 분을 선망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함께 긴 시간을 보내게 됐다는 게 기뻤다. 두 분이 운전하는 차에 4일간 신세를 지게 되다니 성덕이잖아.

김제로 내려오는 내내 편집장님과 질문을 주고받았다. 지금까지는 주로 책의 형태로 콘텐츠를 내 왔지만, 앞으로는 다양한 채널로 콘텐츠를 발신하면서 어느 장소에서도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일해서 먹고살 수 있는 식으로.

그러기 위해서 영상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하셨다. 영어로 만들 계획이냐고 여쭈어봤는데, 영어보다는 논버벌(non-verbal)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셨다. 맞네, 특정 언어에 국한되는 것보다는 아예 언어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게 더 유리할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콘텐츠와 언어를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한국어에 얼마나 깊게 붙들려 있는 인간인가.

그런데도 텍스트여야 할까. 요즘은 '왜 굳이 텍스트야?'라는 질문을 여러 사람의 입을 빌려서, 여러 상황에서 거듭해서 받는 것 같다.

텍스트여야 하지. 그리고 텍스트여야 한다면 최소한 여러 언어를 해야만 한다.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겠지만, 이제야 알았는걸 어째.

  1. 금요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2시, 농부들의 인터뷰

김제 농부 두 분의 인터뷰를 했다. 왜 내려왔는지, 왜 농사를 하기로 했는지, 농사하는 삶은 어떤지, 좋은 것과 싫은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두 분 다 후계농이라서 그렇겠지만, 보유한 인프라가 엄청났다. 넓은 논(물론 주인은 보통 따로 있다), 창고, 정미소, 몇천만 원짜리 농기계들... 농사일이 항상 즐겁고 행복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 막대한 인프라가 주는 관성 때문으로 보였다. 큰 인프라가 그들에게 여유와 안정을 주지만, 역으로 벗어나고픈 답답함을 주는 것 같기도 했고...

레거시(legacy). 유산이지만 동시에 낡은 것. 결국 인간 삶의 모든 건 레거시를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레거시를 잘 살리거나, 잘 버리거나. 나는 지금까지 레거시를 버리면서 다음 단계로 건너가는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레거시를 잘 쌓아가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못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레거시를 잘 살리는 것보다는 잘 버리는 데 집중하는 게 유리할 거라 짐작한다.

  1. 토요일 오후 6시, 플랫폼 기획자 인터뷰

오랫동안 콘텐츠 제작자로 탁월한 트랙 레코드를 쌓아 왔고, 최근에는 사업가로 변신한 분의 인터뷰. 이번 인터뷰의 클라이언트이자 핵심 인터뷰이이기도 한 분이다.

사업이 콘텐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결국 사람들의 문제를 찾아내고, 그 문제를 풀어내는 답을 찾아서 보여주는 일이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콘텐츠 창작자들은 자기만의 골방에 갇혀서 창작물을 만들어낸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수신자에 대한 고민과 접촉 없이는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없다. 만들어지기 어려운 게 아니라 만들어질 수 없다.

사업을 잘할 수 있는 강점이 분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객의 니즈에 맞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고객에 대한 가시성도 분명했으니까. 그래서 로컬 사업이지만 어정쩡한 '착한 연대'에 국한되고 싶지 않고, 사업성이 되는 아이템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다가 실패하기 싫어요."

이 말을 듣고는 급하게 손으로 타이핑을 하면서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인터뷰이의 눈을 봤던 기억이 난다. 중요한 말을 하는 순간 사람의 눈에서 나오는 빛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인터뷰 작업에서 얻는 가장 큰 보상이니까.

맞다. 실패하기 싫다. 실패해도 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 이쪽이 실패하지 않을 길이라고 생각하니까 선택한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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